설립취지문

오늘날 우리는 정체성이 와해되는 혼돈의 공간 속에서 살고 있다. 디지털과 인터넷으로 상징되는 기술문명의 급변, 복제와 환경 파괴로 상징되는 자연과 생명의 변형, 날이 갈수록 심화되는 개인주의와 즉물주의, 대중 문화와 미디어의 거침없는 도발, 신자유주의의 무차별 공세 같은 수많은 현상들이 우리 현실을 혼란의 와중으로 몰아넣고 있다. 반면 새롭고 활기찬 기운이 삶의 저변에서 솟아오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전방위적 소통 체계의 구축, 낙천낙선 운동을 통한 정치 개혁, 억눌리기만 하던 대중의 자신 있는 몸짓들, 학문과 예술에서의 갖가지 새로운 동향들이 날마다 우리 눈앞에서 새로운 지평을 열어젖히고 있다. 이 혼란과 기대, 두려움과 설레임이 교차하는 오늘의 현실은 우리에게 세계와 인간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는 새로운 철학을 요청하고 있다.

철학은 늘 기존의 정체성이 와해되고 새로운 정체성이 요청되는 시대에 활짝 꽃피어 왔다. ‘인문학 위기’라는 표피적인 현상과는 반대로, 오늘날처럼 철학에의 갈망이 대중적 차원에서 퍼져나갔던 적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제도권 철학은 그 속성상 이러한 갈망을 충족시켜 주는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때문에 우리는 다산, 혜강으로부터 80년대의 변증법, 90년대의 새로운 사유에 이르기까지, 담론적 권력 바깥에서 현실을 직시하고 또 모순과 투쟁해 왔던 선철(先哲)들의 위대한 전통을 이어받아 이제 살아 있는 철학에의 길로 나아가려고 한다. 우리는 인간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과 사회적 모순에 대한 투철한 비판 의식을 이 땅의 모든 이들과 같이 하고자 한다. 철학아카데미는 조촐한 외형 속에 거대한 시대적 과업을 담고자 하는 것이다.

철학아카데미는 직업으로서, 전공으로서의 철학을 거부하고 살아 있는 사유를 펼치고 있는 젊은 철학자들의 공동체가 될 것이다. 철학아카데미는 보다 고급한 사유를 갈망하는 대학원생들, 언론인들, 비평가들, 예술가들 등등에게 치열하고 폭넓은 사유의 장을 제공할 것이다. 철학아카데미는 삶에 대해, 의미와 가치에 대해 고민하고 생각하는 모든 이들에게 그들의 고민을 개념화하고 보다 체계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해줄 것이다. 철학아카데미는 이 땅에서 진실로 사유하려는 모든 사람들이 모여 자유롭게 대화하는 장이 되려 할 것이다. 인간으로서의 삶에 대해 깊고 체계적으로 사유하고 싶은 모든 사람들을 철학아카데미에 초대한다.